트럼프 행정부가 국립공원 방문객들에게 미국 역사에 대한 ‘부정적 표현’을 신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실제로 접수된 의견 상당수는 오히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AP통신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립공원관리청(NPS)에 접수된 약 3만5천 건의 신고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해당 정책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한 방문객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국립공원에서 “이런 시도는 비미국적(un-American)”이라고 지적했고, 또 다른 방문객은 “국민들이 서로를 밀고하도록 만드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노스다코타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국립공원을 방문한 한 시민은 “역사를 지운다고 해서 그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논란은 지난해 더그 버검 내무부 장관이 국립공원 내 전시물과 안내판 가운데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내용을 신고해 달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한 ‘미국 역사에 대한 진실과 상식 회복(Restoring Truth and Sanity to American History)’ 정책의 일환이었다.
행정부는 미국의 성취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역사 전시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버검 장관은 당시 국립공원들이 미국의 위대한 유산과 자유, 번영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역사학자와 사서, 데이터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민단체 ‘세이브 아워 사인즈(Save Our Signs)’는 이후 최소 59건의 안내판과 전시물이 수정되거나 철거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수정 또는 삭제된 내용에는 노예제도, 기후변화, 여성 인권, 원주민 역사, 보전운동 관련 내용 등이 포함됐다.
특히 필라델피아의 독립국립역사공원에서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소유했던 노예들의 삶을 설명하는 전시물이 철거됐다가 법원 명령으로 일부 복원되기도 했다.
방문객들이 남긴 의견 가운데는 국립공원의 역사 교육 기능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국립공원을 방문한 한 시민은 “미국 역사 속 어려운 부분까지 포함해 배울 수 있어 좋았다”며 “그런 기억이 있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워싱턴주의 노스캐스케이드 국립공원을 찾은 한 방문객은 “빅풋(Bigfoot)은 못 봤다”는 짧은 글을 남기기도 하는등 일부 의견은 농담조로 행정부를 비꼬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또, 한 방문객은 “국민들이 서로를 신고하도록 만드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라며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떠올리게 한다”고 주장하는 등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일부 방문객들은 특정 전시물이 현대 정치적 의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신고하기도 했다.
미주리주의 해리 S. 트루먼 국립사적지에서는 트루먼 전 대통령을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의 선구자로 묘사한 전시물이 문제로 제기됐다.
또 버지니아주의 부커 T. 워싱턴 국립기념관에서는 흑인 교육운동가 부커 T. 워싱턴을 DEI와 비판적 인종이론(CRT)의 선구자로 설명한 안내판이 논란이 됐다.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시물이 수정됐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내무부는 “많은 경우 신고된 자료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변경 사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메인주의 아카디아 국립공원, 와이오밍주의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뉴욕 자메이카베이 야생보호구역, 버진아일랜드 국립공원 등에서도 전시물과 안내판 변경 사례가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 보존 활동가들은 이번 논란이 단순한 안내판 수정 문제가 아니라 미국 역사 해석을 둘러싼 더 큰 문화·정치적 갈등의 일부라고 지적하고 있다.
세이브 아워 사인즈의 제니 맥버니는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국립공원과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역사는 중요하고, 많은 국민들이 이를 지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프레스 김 훈 기자